
병원이라는 공간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시나요? 하얀 복도, 바쁘게 움직이는 의료진, 알 수 없는 기계음, 냉기로 가득할 것 같은 수술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가장 치열하고도 희노애락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자칫, 단순하고, 정형화된 병원속에서는 환자의 불안도가 높아지고, 장시간 일하는 의료진의 몸의 피로도는 쌓여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설계 단계에서 ‘사람’을 먼저 생각한다면 어떻게 달라질까요? 오늘은 의료기기와 병원 환경 설계에서 쓰이는 두 가지 핵심 접근법, HCD(Human-Centered Design, 사람 중심 설계)와 EBD(Evidence-Bsed Design, 증거 기반 설계)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먼저, HCD란 무엇일까요? 스페인의 한 연구기관에서는 수술용 기기와 비침습 혈당 측정기를 개발하면서 기존 ‘빠른 프로토타입 제작 후 수정’ 방식 대신, HCD 프로세스를 적용했습니다. HCD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기기를 쓸 사람의 관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설계하라.”
이 과정에서 진행된 단계들은 이렇습니다.
- 사용자 관찰 – 실제 수술실, 병동, 가정 환경에서 의료진과 환자가 어떻게 기기를 다루는지 기록
- 사용 시나리오 작성 – 위험 상황, 손이 바쁘거나 시야가 가려진 상황 등을 포함
- 프로토타입 테스트 – 단순 모형부터 시작해, 단계별로 피드백 반영
- 반복 개선 – 실사용 환경에서 다시 테스트하고 수정
이렇게 하면 장비의 버튼 위치, 화면 각도, 조작 방법이 직관적이어서 응급 상황에서도 실수를 줄일 수 있고, 환자 역시 더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HCD 개념을 활용한 환자와 의료진을 위한 설계 사례
1. 간호사들이 사랑하는 신발
덴버의 한 병원 수술 집중실에서 실제 근무 중인 간호사 12명 중 무려 5명이 Hoka 러닝화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이유인즉, 두꺼운 쿠션과 넓은 앞코 구조 덕분에 장시간 서 있는 업무에도 발과 등 통증 없이 편안했다는 평가였다고 해요(링크).
하지만 정말 간호사만을 위한 제품은 따로 있습니다. 국내 스타트업인 널핏(nurfit)은 8만 명의 간호사들과 함께 간호사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제품들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널핏은 하루 6시간 서서 일하는 간호사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소통하며 신발과 압박스타킹을 비롯하여 다양한 케어 제품들까지, 실제 사용자인 간호사들에게 꼭 필요한 제품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HCD 관점에서 사용자인 간호사들에게 가장 필요한 기능과 편안함을 중심으로 설계된 신발은, 의료 현장에서 훨씬 더 실질적인 가치를 제공합니다.

2. 스마트 병상 – 중환자실에서 낙상·욕창 감소 효과
미국의 한 3차병원의 중환자실에서는 실시간 모니터링 센서와 자동 재배치 기능이 탑재된 스마트 병상을 도입했습니다. 그 결과, 욕창 발생률은 25% 감소, 환자 낙상은 15% 줄어든 효과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사례는 HCD 기반 설계를 통해 환자의 안전과 케어 환경 개선을 우선한 결과입니다.
3. 환자 가운 혁신 – Cleveland Clinic & Dignity Giving Suit
전통 병원 가운은 착용 시 불편하거나 헐거워 사생활 침해 등이 우려됐다고 해요. 하지만 이를 개선한 사례들이 있습니다. Cleveland Clinic은 패션 디자이너 Diane von Furstenberg와 협업하여, 앞뒤 뒤집어 입을 수 있는 V‑넥 스타일과 부드러운 소재로 환자 만족도를 높였습니다. 영국 Birmingham Children’s Hospital는 벨크로 여밈 구조의 Dignity Giving Suit를 도입해 환자와 의료진 모두로부터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냈어요.
4. Michael Graves의 병원 가구 디자인 혁신
건축가 Michael Graves는 본인의 척수 손상 경험 후, 디자인의 역할을 치유를 돕는 도구로 재정의했습니다. 그는 휠체어 사용자의 시각에서 침대 옆 테이블, 침상 트롤리, 손잡이 구조 등을 재설계했어요. 예를 들어, 트롤리 상판 색상을 달리해 “여기는 음료용, 저기는 개인물품용”처럼 기능을 시각적으로 구분하게 설계했습니다(링크). 실제 지금까지 약 20여 개 병동에 적용되면서, 환자의 자립감과 환경의 인간성을 크게 높인 사례로 평가됩니다.
환경 디자인에 EBD를 적용하다
EBD는 한마디로 “근거 있는 디자인”입니다. 감이나 취향이 아닌, 연구와 통계를 기반으로 병원 환경을 설계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한 병원은 병실 창문에서 ‘자연 경관이 보이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환자의 회복 속도를 비교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예를 들어, 한 병원은 병실 창문에서 ‘자연 경관이 보이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환자의 회복 속도를 비교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자연 경관이 보이는 병실 환자의 환자는 진통제 사용량이 줄었고 퇴원까지 걸리는 시간이 단축되었습니다. 반면, 경관이 없는 병실 환자는 통증 호소와 회복 지연 사례가 높았습니다. 이처럼, 병실의 위치나 인테리어 등 구성 요소는 단순한 배치의 문제가 아니라, 환자의 치료 과정에 직접 영향을 주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례로, 병동의 조명 색온도 조절이 야간 근무 간호사의 피로도를 줄이고, 낙상 방지 설계(바닥 재질, 손잡이 위치)가 환자의 안전사고를 20% 이상 감소시켰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1. 스위스 취리히 아동병원 (Kinderspital, Herzog & de Meuron 설계)
스위스 취리히 아동병원은 병원이라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탈피하여, 고요한 스파처럼 따뜻하고 안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건축가 Herzog & de Meuron은 병원의 세 개 층을 각각 ‘마을’처럼 구성하고, 200개 이상의 환자실을 개별 ‘코티지’ 형태로 배치함으로써 자연광이 잘 들어오고 소음이 차단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조명 작가 James Turrell의 ‘스카이 스페이스’를 포함한 다양한 무드 조명은 아이들의 감정을 안정시키고 치료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는 데 기여합니다. 이처럼 공간 자체가 치료의 일부가 되는 설계는 환자의 정서와 회복력을 고려한 인체공학적 접근의 대표 사례입니다.

2. 싱가포르 Khoo Teck Puat 병원 (‘정원 병원’)
‘정원 병원’으로 불리는 싱가포르 Khoo Teck Puat 병원은 병원 전반에 걸쳐 식물과 수경시설을 배치함으로써 마치 숲 속에 있는 듯한 치유 공간을 구현했습니다. 연못과 병동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설계되었으며, 옥상정원은 지역 주민들에게 개방되어 지역사회와의 연계까지 고려한 공간입니다. 자연 환기와 공기 순환 시스템은 에너지 사용을 60% 이상 절감하는 동시에, 환자의 회복 속도를 높이고 의료진의 업무 스트레스도 줄이는 효과를 보였습니다. 실제 연구에 따르면 이 병원은 입원 기간을 단축하고 재원 비용도 감소시키는 데 기여한 바 있습니다.
3. Royal Darwin Hospital ‘Greening Project’ (오스트레일리아)
Royal Darwin Hospital은 2021년부터 ‘Greening Project’를 통해 병원 주변에 1200여 그루의 토종 식물을 식재하였으며, 이로 인해 외부 온도가 최대 29℃까지 낮아졌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조경을 넘어 문화적 치유의 가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특히, 원주민 환자들에게 익숙한 자연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정서적 안정과 문화적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실제로 자발적 퇴원률 감소로 이어졌습니다. 병원 환경이 문화적 배경까지 고려될 때, 환자의 치료 순응도와 만족도가 어떻게 높아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4. 네덜란드 Tergooi 병원 (단일 병실 중심 설계)
네덜란드의 Tergooi 병원은 단일 병실 구조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감염률을 현저히 낮추고, 환자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정신적 안정을 보장했습니다. 특히 조용한 환경과 자연 채광, 프라이버시 보장을 통해 환자의 스트레스를 줄이고 회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Tergooi 병원은 여기에 ‘환자 상황 적응형 병실(Patient-adaptive room)’을 도입하여 의료진의 실수를 줄이고, 실제로 의료 오류를 70% 가까이 감소시킨 사례로 보고되었습니다. 이는 설계의 디테일이 어떻게 안전성과 치료 성과에 직결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환자와 의료진의 최선을 위한 컴포랩스의 발걸음
HCD(Human-Centered Design)는 사용자의 니즈와 행동을 중심으로, 무엇을 사용하는가에 초점을 맞춰 제품과 시스템을 설계합니다. 반면, EBD(Evidence-Based Design)는 사용 환경 자체를 개선함으로써, 어디서 사용하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두 접근 모두 사람 중심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며, 환자와 의료진의 불편과 위험을 줄이고, 회복과 업무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목표입니다. 결국 핵심은 ‘누가,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는가’를 출발점으로 삼아 설계의 방향을 정한다는 것입니다.
컴포랩스는 사람 중심 설계가 감이 아닌 데이터 기반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이터·AI 기반 인체데이터 플랫폼 기업입니다. HCD(Human-Centered Design) 측면에서는, 3D 인체 데이터를 활용해 의료기기를 사용하는 사용자의 동작, 시야, 손 위치 등을 시뮬레이션으로 정밀 분석하여 조작 편의성과 안전성을 사전에 검증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EBD(Evidence-Based Design) 측면에서는 공간 내에서의 사용자 동선, 시야, 손이 닿는 범위를 정량적으로 분석하여 병원 레이아웃의 안전성과 효율성을 향상시킵니다. 이러한 방식은 설계자, 의료진, 환자 모두에게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설득력 있는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를 위하여 컴포랩스는 순천향대학교 병원과 함께 컨소시엄으로 인체데이터 기반의 디자인기술에 관한 정부과제를 함께 추진하고 있으며, 전북대학교병원, 양산부산대학교병원, 에스포항병원 등과도 인체데이터 및 의료 서비스 UX/UI에 관련된 협력 관계를 다져가고 있습니다.
